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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월 전

동물이 학대 당하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도 오지 않는다

한겨레

화성외국인보호소에서 모로코 국적의 남성이 가혹행위를 당한 사실이 알려졌고 법무부도 이를 인정했다. 손발이 묶인 채 배가 바닥에 닿은 상태로 좁은 방에 갇혀 몸부림치는 영상이 공개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다. 이는 명백한 고문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고문을 일명 ‘새우꺾기’라 부른다.

인간이 생명을 괴롭히는 방법이 얼마나 다양한지 모른다. 원산폭격, 김밥말이처럼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진 가혹행위부터 비녀꽂기, 매미잡기, 쥐잡기, 돼지묶음, 새우꺾기, 통닭구이, 날개꺾기 등 미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가 있다. 물론 ‘고문’이라 일컫지 않고 얼차려나 기합이라 말한다. 고문의 이름을 살펴보면 공통점이 눈에 들어온다. 인간이 아닌 다른 종류로 분류해서 이른다. 사물화하거나 동물화한다. 이런 이름들을 사용할 때 고문은 마치 놀이처럼 들린다. 가혹행위를 겪는 사람은 그 순간 사물이나 음식, 동물이 된다.



_______폭력의 대상을 동물화한다는 것

동물을 의인화하면 같은 생명체로 감정이입하지만 인간을 동물화하면 학대에 대한 죄의식을 덜 수 있다. 고문 가해자에게는 (사람이 아니라) 돼지를, 새우를, 닭을 묶고 꺾는 행위로 순화된다. 반면 고문 피해자는 (사람이 아니라) 돼지처럼, 새우처럼, 닭처럼 마구 짓밟히는 굴욕을 경험한다. 실제로 화성외국인보호소의 피해 외국인은 “그들은 나를 동물처럼 취급했다”며 고통을 호소했다.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그는 보호소의 처우에 항의하다가 석 달 사이에 12차례나 독방에 갇혔다. ‘보호소’라고 하지만 실은 인권유린의 현장이었다.

해당 사건이 알려지기 전이었던 지난 6월 보호소의 외국인 43명이 시민모임 ‘마중’에 보낸 진정서에는 부당한 대우를 받는 현실이 담겨 있었다. 이들은 “사람다운 삶을 살고 싶다”, “우리가 동물입니까? 우리가 왜 그런 짐승 취급을 받아야 하나요?”라고 한다.

가혹하게 누군가를 때릴 때 흔히 ‘개 패듯이’라고 한다. 물리적인 구속이나 폭력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수시로 짐승 취급을 받는다. 2016년 한 고위 공무원의 ‘민중은 개돼지’ 발언, 그리고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일명 ‘개 사과’ 사건 역시 사람을 짐승 취급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그렇다면 동물에게는 그래도 되는가. 그리고 이 질문은 현재 폭력을 경험하는 인간의 입장을 설명하는 데 혹시 방해가 되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근본적으로 동물에게도 그러면 안 된다는 공감대가 있어야 인간이 겪는 수많은 차별과 폭력을 우리는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비인간화된 생명에게는 ‘그래도 되는’ 폭력이 존재할 때, 인간은 지속적으로 ‘진짜 인간’을 구별하려고 한다. 인간중심주의는 동물과의 대비를 통해 누가 인간인지를 구체화하기 때문이다.

장애와 동물 사이의 교차점을 통해 인간과 동물의 권리를 사유하는 미국의 활동가 수나우라 테일러가 <짐을 끄는 짐승들>에서 던진 질문에 절실히 공감한다. “인간의 동물화라는 잔인한 현실과 동물 멸시에 맞설 필요성이 양립할 수 있는지 묻는 것, 더 나아가 어떻게 하면 우리 자신의 동물성을 자각할 수 있는지 묻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이다. 동물에 대한 인간의 억압이 인간 사이에서의 위계와 억압과 무관하지 않다. 목적에 따라 생명을 도구화하고 위계를 정할 때 흑인은 노예, 여성은 재생산용, 동물은 식용이다. 지적장애인은 염전에서 노동착취를 당하고,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외국인 노동자는 저임금으로 가혹한 노동을 한다. 어린이, 노인, 장애인, 난민, 여성을 대하는 방식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다.



_______‘사회적 합의’로 뭉개진 평등권

흔히 사용하는 ‘사회적 합의’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어떤 사안을 회피하기 위한 공허한 정치적 수사이면서 동시에 합의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정상적인’ 사람이 누구인지 암시하는 말이다. 인간(일부 남성들)이 비인간(여성, 퀴어, 장애인, 난민, 아동, 동물 등)을 존중해야 할 존재로 허용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을 사회적 합의로 여긴다.

지난달 31일 국민의힘의 경선 토론에서 당시 유승민 후보와 윤석열 후보 사이에 오간 대화는 동물권과 인권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실체가 무엇인지 매우 잘 보여준다. 유 후보가 개 식용 문제에 대해 질문하자 윤 후보는 “반려동물에 대해서는 우리 가족에 준해가지고 우리가 대우를 해야 되고”, “식용 개라고 하는 거는 따로 키우지 않습니까”라고 했다.

유 후보는 ‘개를 식용으로’라고 말하지만 윤 후보는 ‘식용 개’라고 말했다. 단어의 앞뒤 순서가 바뀌었을 뿐인데, ‘개 식용’과 ‘식용 개’ 사이에는 많은 거리가 있다. 개를 식용하는 인간의 행위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식용이 목적인 개를 구별해 버린다. 가족과 식용의 구별처럼 어떤 생명을 자신의 목적에 따라 존재 자체를 다른 가치로 판단한다. 이것이 바로 대상화다. ‘다른 종’의 고통은 무시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같은 토론회에서 설전을 벌이던 윤석열 후보는 반려견과 식용견이 다르다는 주장 끝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차별금지법하고 똑같은 거 아닙니까?” 이것은 의미 있는 고백이다. 가족에 준하는 반려동물과 먹거리 목적의 동물을 구별하듯이, 사람대접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과 그럴 가치가 없는 별개의 사람 종을 구별하기 때문에 두 사안이 모두 ‘사회적 합의’를 핑계로 미뤄도 되는 ‘똑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현재 여당에서도 차별금지법에 적극적이지 않기에 결국 국회 국민동의청원 심사기한이 2024년으로 연장되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간사인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사회적 논의’를 언급했다.

프랑스 정신과 의사 프란츠 파농은 인종주의에 저항하는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이 연구의 궁극적 지향점이 “인간에게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다른 ‘동물들’과 다르다고 스스로 상상하는 이 나르시시즘을 끝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라 했다. 여기, 동물이 있다. 동물이 학대받는 세상에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도 오지 않는다. 인간은 계속해서 ‘동물 같은 인간’을 찾기 때문이다.


예술사회학자.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2020) <타락한 저항>(2019) 등의 저자. 사회의 구석구석을 비평합니다. 아름다우면서도 정확한 비평의 가능성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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